[KR] 제인베넷 - 생동하는 물질 :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2020)


**이 글은 개인적인 질문과 독서에서 출발했고, 그 생각들을 챗지피티와의 대화를 통해 함께 밀어붙이며 완성해 나갔다.

'“무엇이건 간에 모든 사물은 더 완전하든 덜완전하든, 그것이 존재함에 따라 동일한 힘을 갖고 언제나 존재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이 점에서는 모든 사물이 동등하다.” 스피노자는 “심지어 떨어지는 돌조차도 그 안에서 계속 움직임을 유지하려 한다”고 말한다.'

제인 베넷은 세계를 인간 의지의 배경으로 보지 않는다. 전선, 음식, 쓰레기, 금속, 동물, 전기, 바람과 같은 비인간 물질들 역시 고유한 힘과 작용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물질은 수동적 재료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사건을 만들어내는 행위적 존재, 즉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이다.

“이 책의 문장들은 ‘나의’ 기억, 의도, 견해, 장내 세균, 안견, 혈당뿐 아니라 플라스틱 컴퓨터 키보드, 열린 창에서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 방의 공기와 미립자로부터 창발한 것이다. 이 페이지의 내용들은 특정한 정도의, 어느 정도 지속하는 권력을 지닌 동물-식물-무기물-목소리가 이루는 집단이다. 즉, 여기서 전개되는 내용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배치다.”

이 통찰을 확장하면,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 자체가 단일한 주체의 작용이 아님을 드러낸다. 우리의 경험은 언제나 인간의 의도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공기, 물질, 공간, 기계, 신체, 환경 조건이 함께 작용하며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가. 나는 현대인이 수많은 자극 속에 살고 있음에도, 실제로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시 환경, 자동화된 시스템, 알고리즘은 우리의 주의를 끊임없이 점유한다. 우리는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이미 구성된 흐름을 따라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몇 초 안에 반응을 유도하지 못하는 신호는 사라지고, 즉각적인 자극이 없으면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감각은 경험이 아니라 반응으로 축소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세한 감각’은 하나의 실천이자 동시에 정치적 태도가 된다. 현대 자본주의는 우리의 주의를 상품화한다. 더 짧고, 더 빠르고, 더 강한 자극이 유리한 구조 속에서, 미세한 감각은 약한 신호에 머무르고 빠른 전환을 거부한다. 이는 주의력을 다시 자기 것으로 회수하려는 시도이자, 인간 중심적 인식 체계에 대한 작은 저항이다.

또한 이 감각은 우리가 단일한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플랫폼 인터페이스, 기술 장치, 환경 조건, 신체 상태는 모두 경험을 조직하는 요소들이다.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이미 구성된 관계망 속에서 작동하는 존재다. 미세한 감각은 이 비인간 요소들을 다시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취향이나 섬세함의 문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경험의 물질성을 다시 인식하는 태도다. 어떤 현상이든 그것은 단일한 원인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다양한 물질, 환경, 시간, 신체가 함께 작용하는 배치 속에서 발생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이러한 복합적 관계의 결과다.

이 문제는 감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들—먹기와 입기—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작동한다.


''니체와 소로에게 식사는 인간의 신체와 비인간 사이에서 양방향으로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이었다. 차,커피,채소,맥주,음악,베리,생선,마멋,메마른 소로의 신체, 병약한 니체의 신체는 모두 어느 정도의 생기적 힘을 갖고 있다.'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이 음식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는 토양, 기후, 계절, 유통망, 노동, 조리 도구, 식탁의 관계가 함께 얽혀 있다. 지역 재료를 먹고 계절성을 존중하려는 시도는 어떤 윤리적 우월성의 표시라기보다, 이러한 물질적 관계망을 더 선명하게 인식하려는 하나의 방식에 가깝다.

입기 또한 마찬가지다. 의류를 소비하는 행위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과 폐기의 시간, 섬유의 물질성, 노동의 흔적, 순환의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시 사용하는 선택은 물질의 흐름에 미세하게 개입하는 방식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어떤 실천을 더 윤리적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동일한 함정에 빠진다. 이 시스템 안에 있는 한 완전히 바깥으로 벗어나는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동일한 물질적 조건 위에 서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어떤 관계망 속에 놓여 있는지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다. 이러한 감각은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삶 전반으로 확장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이 곧바로 구조를 바꾸지는 않는다. 개인의 실천은 쉽게 시장에 흡수되고 다시 상품화된다. 따라서 이것은 변혁이라기보다, 변화를 감지할 수 있게 만드는 조건에 가깝다.

또한 이러한 감각을 하나의 방식으로 일반화하는 것도 위험하다.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상태는 안정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불안을 유발할 수 있다. 감각과 인식은 단일한 규범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몸과 환경이 만들어내는 복수의 관계다.

''환경이 실제로 인간의 신체와 마음 내부에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세심한 관용을 베풀며 일상생활 속에서 정치적으로, 기술적으로, 과학적으로 당신 안에서 전진하고 있음을 인정하라. 비인간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내려는 헛된 시도를 단념하라. 그 대신 당신 역시 당신이 참여하고 있는 배치 내의 비인간들과 더 정중히, 전략적으로, 세심하게 관여하도록 노력하라. '행성의 건강이 점점 더 인간의 개입에 의지하고 있으며, 언젠가 지구의 대기 중의 산소, 오존, 이산화탄소 사이의 관계를 통제하기 위한 거대한 프로그램을 세울 날이 도래할 것이 때문이다 ...... 인간성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자연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자아를 순수한 인간으로 정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나 자신을 인간만이 아닌 것으로 느끼기 시작할 수 있을까? 가타리는 우리가 이 새로운 자아를 개발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횡단적인'사고 양식을 계발하기를 요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이러한 인식을 말해야 하는가. 오늘날 가장 희소한 자원은 주의력과 감각의 여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끊기고, 너무 빠르게 전환하며, 점점 더 강한 자극에 길들여지고 있다. 이때 미세한 변화에 머무르고, 반복 속의 차이를 감지하며, 물질과 환경이 함께 만들어내는 사건을 인식하는 일은 세계를 다시 두껍게 경험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어떤 특정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다시 인식하게 만드는 하나의 태도다. 세계는 이미 생동하는 물질들의 집합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함께 흔들린다. 중요한 것은 더 나은 선택이 아니라, 이미 작동하고 있던 관계들을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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