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 마르틴 부버 - 나와 너 (1966)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를 읽으며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새로운 사상을 처음 접했다기보다 내가 이미 감각적으로 알고 있던 어떤 것들을 다시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살아가며 말로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던 관계의 감각, 특히 자연이나 동물 앞에서 언어 없는 채로 열리는 어떠한 상태들이 이 책 안에서 철학적 언어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낯선 지식을 주기보다, 이미 내 안에 있던 감각에 이름을 붙여주는 경험에 가까웠다.
읽는 내내 부버의 사유는 처음에는 상당히 범신론적으로 느껴졌다. 세계 곳곳에서 신성이 드러나고, 자연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영원한 너’를 만난다고 말하는 방식은 신이 세계 전체에 스며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책을 따라가며 그것이 단순한 범신론과는 다르다는 점도 이해하게 되었다. 부버는 신과 세계를 동일시하기보다, 관계 속에서 현존하는 초월성을 말한다. 즉 신은 사물 그 자체라기보다, 존재들이 서로를 진실하게 마주하는 순간 드러나는 차원에 가깝다.
특히 반가웠던 것은 내가 명상을 하며 자주 느꼈던 감각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 있을 때 나와 바람, 나무, 흙의 경계가 옅어지며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많았다. 그것은 논리로 설명하기보다 몸으로 먼저 알게된 감각이었다. 요가 호흡 디피카나 요가수트라 혹은 종종 들었던 명상 워크샵을 통해서 과학적 분석 혹은 체험적 묘사로 알아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을 직접 체험하는 것은 정말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화가가 자기와 마주서 있는 것을 바라볼 때 그에게는 어떠한 형상(Gestal)이 나타난다. 그는 이 형상을 작품으로 속박한다. 이 작품은 신들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 더라도 그 작품은 거기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잠을 자고 있을 뿐이다. 중국의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옥피리를 불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나의 피리가 자아내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신들을 향해 피리를 불었다. 신들은 한결같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부터였다. 사람들이 그 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이렇게 해서 나는 신들의 품을 떠나 인간의 세계로 되돌아왔다." 이는 작품이 인간을 없어서는 안 될 상대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꿈속에서처럼 사람과의 만남을 갈망한다. 즉 이 작품 안에 속박되어 있는 형상을 인간이 풀어내고, 영원의 한 찰나에서 그 형상을 품어 안아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다. 이 일이 원수된 뒤에 인간은 작품에 관한 모든 것을 경험한다. 작품은 이렇게 만들어졌다든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든가, 이러한 특질을 가졌다든가, 이러한 위치에 있다든가를...
이렇게 볼 때에는 예술적 작품에 관한 과학적 이해나 심미적 이해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도 리어 이러한 이해 방식은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만 사람이 자기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난 뒤에 관계의 진리 안으로 뛰어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관계의 진리만이 인간 지성의 모두를 포함하고 또 이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 제2부 인간의 세계 83p
위의 문장은 특히 내가 놀랐던 문장이다.. 예술 작품이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아니라, 먼저 어떤 형상으로 예술가 앞에 나타나고 예술가는 그것에 응답하여 작품 안에 구현한다는 대목이었다. 그는 화가가 자기 앞의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상(Gestalt)을 만나고, 작품은 그렇게 현실 안에 묶여 있지만 여전히 잠들어 있으며,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다시 깨어난다고 말한다. 이 설명은 내가 최근 3집에서 경험했던것을 매우 정확하게 표현해주었다.
돌이켜보면 1집과 2집을 만들 때까지의 나는 비교적 분명한 계획 속에서 작업했다. 방향을 정하고, 주제를 생각하고, 곡의 구조를 설계하며 내가 주도적으로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그 안에도 영감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내가 음악을 통제하고 조직한다는 감각이 더 컸다. 작품은 내 의지와 기획의 결과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번 3집 작업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다. 무엇을 써야겠다는 계획이 먼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분명한 설계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물론 계획형 인간인지라 최소한의 장치로 트랙수와 악기 구성 정도는 해두었지만 그 내용은 아무것도 정해지거나 쓰여 있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애초에 앨범 시작할 때 어떤 계시를 받는 듯한 느낌이 먼저 찾아왔다. 내가 앨범을 만들고 곡을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써지는 듯했고, 아이디어와 멜로디가 동시에 도착하는 순간들도 반복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우연한 장면, 일상의 사소한 감각, 문득 스쳐 지나간 이미지들이 하나의 노래가 되어 나타났다.
그 경험은 단순히 영감이 떠올랐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 깊은 안쪽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던 것이 어느 순간 음악으로 모습을 드러낸 느낌에 가까웠다. 나는 그것을 대낮이고 새벽이고 조금씩 붙잡아 음악의 형태로 옮기는 사람에 가까웠다. 부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작품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나타난 형상에 응답한 셈이다. 그래서 이번 작업은 이전보다 훨씬 생생했고, 소중했고, 동시에 설명하기 어려운 필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냥 내게 어느 날 갑자기 다가와준 음악들이기 때문에..
또한 부버는 작품이 인간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작품은 완성된 뒤에도 잠들어 있으며, 누군가 그것을 만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깨어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음악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든 곡도 파일이나 음원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듣고, 자기 기억과 감정 속에서 그것을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할 때 비로소 작품은 생명을 얻는다.
결국 이번 3집 작업은 나에게 창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이전에는 내가 작품을 만들어낸다고 믿었다면, 이번에는 작품이 나를 통로로 삼아 세상에 나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예술가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가오는 형상을 알아보고 그것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부버의 문장은 내가 막연히 느끼고 있던 이 경험 또한 가장 정확한 언어로 설명해주었다.
이와는 반대로 '너'의 세계는 닫혀진 세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중된 정신을 가지고서 '너'의 세계에 이르러 보고자 하는 사람은 마침내 자유를 의식하게 될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유는 없다."라는 신념으로부터 탈출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자유에 이르는 첫걸음 인것이다. 제 2부 인간의 세계 111p
그는 물질적인 것 혹은 본능 적인 것의 지배를 받는 연약하고 부자유한 의지를 내어버리고, 필연적 존재를 떠나 운명적 존재로 향하는 대의지에 몸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경지에 한 번 도달하고 난 뒤에는 사람은 다시는 아무것도 간섭하려 들지 않으며, 그와 동시에 사물의 단순한 생기를 결코 묵인하지 않게 된다. 제 2부 인간의 세계 113p
환원이 불가능한 궁극적 통일체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그 통일체의 의미를 알 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알아차릴 수는 있으나 관념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세계의 처음도 마지막도 내 안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내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결코 이 세계의 처음과 마지막이란 '존재한다'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제3부 영원자 너 175p
동물의 눈은 위대한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동물은 소리나 몸짓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도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만으로 자신의 육체속에 있는 신비와 불안을 뚜렷이 표현할 수 있다. ... 그러므로 동물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즉 식물계의 안전성과 정신계의 모험성 사이에 위치한 피조물의 불안한 동작, 그것이 바로 신비를 알려주는 언어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연이 처음으로 정신을 스쳤을 때에 즉 '인간'이라고 불리는 정신의 정복 기획에 굴종하기 이전에 자연이 더듬더듬 토해내는 말이다. - 제3부 영원자 너 179p
현재에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남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따라서 남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 자만이 하나님과의 호응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 제3부 영원자 너 192p
뿐만 아니라 동물적인 감각과 그 안에서의 관계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에서도 깊이 공감했는데, 강아지를 키우며 강아지의 눈으로 세상을 읽는 듯한 순간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있었다. 냄새와 기척, 움직임과 분위기로 세계를 감지하는 동물적 감각은 작년부터 올해까지 내게 매우 강렬한 것이다. 부버가 자연과 동물, 그리고 비언어적 관계에 대해 말할 때, 마치 그런 체험을 공감해주는 사람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버가 동양철학과 인도철학에도 관심이 깊었다는 점 역시 흥미로웠다. 실제로 우파니샤드나 요가 사상과 닿아 있는 결이 느껴지기도 했다. 자아를 비우고 더 큰 존재와 접속하려는 태도, 언어 이전의 진실을 감각하려는 자세는 분명 유사하다. 그러나 동시에 엄밀히는 다르다고 느꼈다. 인도철학의 일부 전통이 궁극적 합일을 향한다면, 부버는 끝까지 ‘나’와 ‘너’의 관계성을 유지한다. 하나가 되기보다 서로를 마주하는 사건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지점은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신유물론, 특히 요즘 읽고 있는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이 떠올랐다는 점이다. 베넷이 물질 자체의 활력과 행위성을 말한다면, 부버는 물질과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적 생동감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두 사상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질을 죽은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접점을 가진다.
이 덕분에 나는 물질과 인간의 관계를 유물론적 시각과 현상학적 혹은 관계적 시각이라는 두 방향에서 함께 사유해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생애를 찾아보며, 시오니스트였다는 사실도 새롭게 다가왔다. 다만 오늘날 흔히 떠올리는 강경한 정치적 시오니즘과는 거리가 멀고, 보다 비주류적이며 윤리적이고 공존을 지향하는 입장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기독교권에서도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동시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챗지피티한테 물어보니, 실제로 논란이 많이 되었다고 하고, 또 사랑도 참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의 사상이 전통적 교리 체계 안에 완전히 들어맞기보다는, 경계선 위에서 종교와 철학, 인간과 신, 세계와 관계를 다시 묻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너』는 결국 타인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한 책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어떻게 살아 있는 것으로 경험할 것인가에 대한 책이었다.
나에게는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금 활자로 확인하게 해준 책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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